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드 굴리트 (문단 편집) === 클럽 === 학교에서 [[경제학]]을 가르치던 교사였던 [[수리남인]] 아버지 조지 굴리트(George Gullit)와 암스테르담에 있는 한 박물관의 관리인이었던 [[네덜란드인]] 어머니 리아 딜(Ria Dil) 사이에서 태어난 굴리트는 [[에레디비시]] 1979-80 시즌, HFC 하를럼에서 16세의 나이로 데뷔하며 에레디비시 역대 최연소 데뷔 기록을 세웠다. 팀은 굴리트가 데뷔한 시즌에 꼴찌를 차지해 2부 리그로 강등되었으나, 굴리트의 활약으로 1980-81 시즌 2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시즌 만에 [[에레디비시]]로 승격했다. 굴리트는 1981-82 시즌에 하를럼을 리그 4위로 올리며 [[UEFA 유로파 리그|UEFA 컵]] 티켓을 따내는데 기여했는데, 1982-83 시즌 UEFA컵은 HFC 하를럼 역사상 유일한 유럽 클럽 대항전이 되었다. 이때 보여준 활약으로 굴리트는 '[[네덜란드]]의 [[던컨 에드워즈]]'라는 별명을 얻었다. 세 시즌 동안 91경기 31골을 넣은 굴리트는 [[페예노르트 로테르담]]로 이적하여 [[요한 크루이프]]와 함께 뛰면서 1982-83 시즌에 리그 우승과 KNVB컵 우승을 차지했다. 그러나 외부적으로 [[인종차별]] 발언을 듣기도 해서 [[PSV 에인트호번]]으로 이적해 리그 2연패를 이끌고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상도 받았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i2.cdn.turner.com/130823124858-ruud-gullit-1989-horizontal-gallery.jpg|width=100%]]}}} ||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ruud-gullit-diego-maradona-ac-milan-napoli_4g17b1v3bhs41bx4rgtg5xzkd.jpg|width=100%]]}}} || 이후 [[AC 밀란]]으로 이적하여 1987-88 시즌 [[디에고 마라도나]]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[[1987년]] [[발롱도르]]를 수상한다. 특히 [[마르코 반 바스텐]]과 투톱을 이뤄 맹활약하며 [[세리에 A]] 우승을 이끌었다. 1988-89 시즌에는 [[오렌지 삼총사]]를 결성하여 [[아리고 사키]]의 [[사키이즘|압박 축구]]를 토대로 [[UEFA 챔피언스 리그|유러피언컵]] 결승전에서 반 바스텐과 굴리트가 2골씩 득점하며, [[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|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]]를 상대로 4:0 대승을 거두었다. 1989-90 시즌에도 [[SL 벤피카]]를 격파하고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지만, 굴리트는 88년부터 발생한 무릎 부상이 반월판 부상으로 커지며 시즌을 거의 벤치에서 보내야 했다. 마라도나의 라이벌이었고 87-88 시즌엔 그에게서 리그 우승컵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라이벌리를 이어가지 못했고 월드컵에서도 부진했던 탓에 마라도나의 라이벌 자리는 그와 2차례 월드컵에서 맞대결해 1승 1패를 기록하고 자서전에서 직접 인정했던 [[로타어 마테우스]]에게 넘어가게 된다. 다음시즌인 1990-91 시즌부터 적용된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정으로 인해 [[사키이즘]]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수비전술에 변수가 발생하며 어려움을 겪었다. 또 유러피언컵 4강에서는 [[올랭피크 드 마르세유]]를 만나 밀란이 패배했다. 여기서 밀란은 조명이 망가져 재경기를 해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그냥 경기장을 떠나버렸고 이에 [[유럽 축구 연맹|UEFA]]는 1년간 유러피언컵 출전 금지를 내린다. 사키는 이를 마지막으로 밀란을 떠났지만 [[파비오 카펠로]] 감독이 부임해 그의 밀란을 잘 계승해내며 다시 전성기를 이끌어낸다. 카펠로 감독 체제에서 1991-92 시즌에 리그 [[무패 우승]]과 그 다음 시즌도 우승을 경험하며 리그 2연패. 또 1992-93 시즌에는 유러피언컵에서 준우승하는 등 발군의 활약을 펼친 후 1993년에 밀란을 떠나 [[UC 삼프도리아]]에서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불태웠는데 [[스벤예란 에릭손]] 감독의 밑에서 만치니와 주로 투톱으로 나서며 리그 15골 12어시스트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고 [[코파 이탈리아]] 우승을 차지했다. 피파 온라인 4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이 삼프도리아 시절이 자신이 가장 잘했던 시절이라고 한다.[* 실제로 93-94 시즌 굴리트는 신체능력은 유지된 상태에서 기술이 노련해져서 플레이가 더욱 유연했다. 몇몇 세리에 올드팬들은 마라도나와 라이벌을 형성했던 87-88 시즌보다 낫다고 평가할 정도.] 이후 잠시 밀란에 복귀했으나 큰 활약은 하지 못했고, 어린 시절 우상이였던 [[글렌 호들]]이 이끌던 [[첼시 FC|첼시]]로 이적하면서 영국으로 향했다. 이탈리아 무대에서 주로 공격수로 뛰었던 것과 달리 첼시에선 리베로와 홀딩 미드필더로 출전했는데 공격수로 나서는 것보다 미드필더로 뛰는 것이 더 뛰기 편했다고 한다. 첼시는 리그 11위를 기록했지만 굴리트는 혼자 팀을 이끌며 [[PFA 올해의 팀]]에 올랐다. 이후 [[선수 겸 감독]]을 맡아 [[FA컵(잉글랜드)|FA컵]] 우승을 차지한 후 감독에 집중하기 위해 은퇴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